w. 섬무님(@R05ENK4V4L1ER)
P5R 아케치 고로 드림 커미션
“바이올린이어도 피아노가 필요한가?”
카논은 대답지 않았다. 창문을 때리는 빗발은 그리 거세지도 않으련만 어째 듣지 못한 것만 같았다. 건반 뚜껑까지 분리한 그랜드피아노의 헤드를 매만지는가 하면 일어나 현 주위를 오가는 내내 카논은 분주하기만 했다. 조율에 열중하는 동안 그녀의 안중에서 벗어난 듯해 그것대로 아케치는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아주 약간.
재차 입을 열어 물으려 할 적에, 카논은 소리굽쇠를 가볍게 두드렸다. 들은풍월이나마 아케치 또한 소리에 관해 아는 것은 있었다. 때문에 귀로는 건반을 한번 두드리고 다시 소리굽쇠를 두드리는 이유를 잡아낼 수 없었으나 머리로는 알았다. 마땅히 공명할 현이 공명하지 않고, 건반을 두드려도 소리굽쇠가 아무 반응이 없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뜻이었다. 그 태생적인 민감함은 그녀가 그녀 스스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듯싶었다. 한 박자 늦게 카논은 입을 열었다.
“일단은 음역이 가장 넓은 악기니까. 지표가 되기 쉬워. 더군다나 이런 장마철엔.”
제아무리 연습실이라 해도 이런 습한 장마철은 어쩔 수 없어서, 현악 또한 민감한 사람에게는 아침에 조율하고서도 오전 연습 마치고 물만 마시고 왔더니 조율을 다시 해야 할 때도 있다고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귀로 듣기에 음이 흐트러졌다고 느끼지 못한 것을 보면 고작해야 몇 분의 일 정도 흐트러졌을 텐데. 호시미야 카논만이 부자연스럽다는 얼굴을 하더니 즉각 렌치를 들고선 하나씩 현을 조이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을 제대로 조율하려면 피아노를 조율해야 하고, 또 피아노를 제대로 조율하려면 바이올린에 준하는 만큼 음 자체의 정확도를 본인 귀와 머리부터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니. 그리고 그 음의 정확도는 악기의 소리를 들어온 경험으로 익혀지는 것일 테다. 어째, 객관적인 정확도라는 것은 당초 존재하지 않았고 우로보로스와 다름없는 구조라고 생각되었으나 눈앞의 신동은 그것이 영 껄끄럽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여든 개가 넘는 건반을 하나하나 렌치로 매만 지고 고른 치열 같은 그것을 눌러보는 번거로움을 즐기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역시 아케치는 그 모습이 언짢았다. 요즘 시대에 튜너 대신 소리 굽쇠를 두드리는 구닥다리 조율마저 데이터보다는 물성 있는 것의 정확도를 신뢰하는 사람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그녀가 소리굽쇠를 다시 한번 두드리자 이번에는 정확하게 처음 건드렸던 건반에 연결된 현이 공명했다. 카논은 놀라워하지는 않았으나, 명백히 뿌듯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냥, 그 자신 있는 태도 전부가 언짢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대도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실 같았다. 아케치는 성큼 다가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아직 건드리지 않은 왼편의 흑건을 눌렀으나 한껏 예민해진 귀로도 뭉툭함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뭉툭한 것으로 그는 제 음성을 골랐다.
“금속이 풀어지는 건 습도랑 온도 모두 영향이 있다던데.”
바이올린의 현과 피아노의 현이 각기 재질이 다르다는 것에 기대어 괜히 던져본 말에도 카논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신중하게 몇 도만 렌치를 꺾은 손이 떨어질 무렵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서 에어컨 틀었잖아.”
“얼마나?”
“6분의 1도쯤 흐트러졌으니까 30분 전에 5도쯤 낮춰서 틀고 지금은 제습으로.”
근거 대신 바로 정답부터 나오는 게 언짢다는 것이다. 음계의 세계는 어떤 객관성의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데, 정답만은 정해진 단위가 있는 세계다. 확실한 정황 증거가 있어야 하는 추리와 달리 음계는 기본적으로 직감인 반면 나오는 결과는 정확해야 한다는 모순으로 구성된 세계였다. 아케치는 그 무엇 하나 마음에 차는 것이 없었다. 카논이 바이올린을 켜지 않았대도 이렇게까지 혹평할까 싶었으나, 그것은 조율을 우로보로스에 비견하는 것만큼이나 허망한 일이었으므로 곧 관두기로 했다.
한동안 렌치만 돌려가며 피아노 뚜껑 아래 머리를 두고 있던 카논은 그제야 슬쩍 고개를 들고선 아케치를 바라보았다. 아케치 고로는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에어컨이 쌩쌩한 방에서조차 집중하느라 맺힌 엷은 땀방울에 옅은 갈색 머리칼이 뭉친 모습이나, 채도 없는 눈동자가 도리어 반짝거리며 그를 비추는 태도 앞에서 이대로 그랜드피아노 뚜껑을 내려버리면 신동의 인생도 손쉽게 끝장 난다는 생각 따위를 하지는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신동의 머릿속에 각인된 그의 흔적, 날것으로 해체된 그를 짓누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만 때때로 올라왔다가 금세 사그라들었을 뿐이었다.
휘발성 높은 감정이었으니 표정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생각했으나, 어째 이미 들킨 모양이었다. 숱하게 드러내 보인 얼굴 앞에서 단 한 번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녀의 동그랗게 뜬 눈을 기이하게 만들었다. 그리곤, 카논은 생긋 웃었다. 아케치는 그녀가 그런 얼굴로 그를 바라볼 때를 알았다. 지나치게 익숙해진 얼굴이었다.
“미안, 지금은 연습실이라서 내가 못 나가겠네! 아직 하는 것도 있고. 봐, 서른 개는 넘게 남았을걸.”
지금 그걸 배려라고 말하는 건가? 그는 저도 모르게 입 밖에 나오려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그녀는 그의 심기를 살피고 가장 불편한 곳은 지나치지 않으려 했으며 단 한 번도 아케치 고로가 스스로 택한 것을 교정하려 들지 않았으나 단 한 가지만은 하지 않았다. 입안의 혀처럼 구는 것. 아케치에게는 지나치게 익숙해진 일이었음에도 카논에게는 도무지 몸에 배어들 수 없는 일인 모양이었다.
아케치는 결국 페르소나처럼 덧씌우고 있던 표정을 벗고 입을 열었다. 얼굴 위로 덮은 껍질은 이미 지나치게 익숙해진 것이었으므로 도리어 벗을 적에 껄끄러웠다.
“그렇다면 내가 나가지.”
카논은 말리지 않았다. 그녀가 잘못한 것이 없었으므로, 잘못했다는 자각을 촉구할 수도 없었다. 아케치가 카논에게 정반합과 잘잘못을 따지는 논리를 가져오고자 한다면 애당초 그녀의 존재와 태생적으로 타고난 것 전체를 부정해야 마땅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비이성적이며 온당치 못한 일인지는 그 스스로 잘 알았다. 아케치가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자, 손톱을 바짝 깎아 둥근 손가락 끝으로 해머를 만지작거리며 카논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다시 거두어졌을 때, 그리고 채도 없는 눈길이 다른 것을 담을 때 말은 그를 향했다. 언제나 그를 향했으니 친숙한 것처럼. 서두를 떼어도 아케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있지, 아케치. 나는 네 성을 부르는 게 싫지 않았어.”
돌아섰을 때 등 뒤로 박히는 말은 송곳이었다. 단 한 번 악의로써 던진 송곳이 아니었고 그에게 꽂히기를 바라고서 벼린 말이 아니었다. 아프기를 염원한 사람이라면 부정성의 어휘는 도리어 걷어냈을 터였다. 쏟아지는 말과 쏟아지는 비 사이의 소리를 채우는 것은 어휘와 숨과 감정 하나하나 아케치 고로에게 가 닿기를 바랄 적에 그것이 송곳이기를 바라지 않은 사람만이 꽂을 수 있는 종류의 말뿐이었다. 호시미야 카논을 송곳으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아케치 고로 자신뿐이었다.
마침내 멈춘 발이 움직이지 않은 채 망설였다. 선의가 악의가 되는 순간을 카논은 모르지 않을 터였다. 모른다고 하기에 그의 바닥은 낱낱이 밝혀졌고 그녀의 바닥 또한 낱낱이 들여다본 지 오래였다. 오독되기 쉬운 어린 날, 유난을 떨던 유년의 날. 카논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할 적에, 그리고 아케치가 끝까지 그녀의 이름만을 부르지 않을 적에 비로소 들린 말은 처음으로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송곳으로 치부할 수만 있다면 편했으련만.
그러나 아케치는 카논에게 의중을 따져 묻지 않았다. 발길을 돌릴 생각도 없었다. 애석하게도 카논은 싸구려 같은 말을 저당 잡아 아케치를 돌려세울 만큼 얕은 수작을 부릴 만큼 영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점을 몹시도 싫어하고, 아주 조금만 편안해하고, 몹시도 불편해했지만. 덕택에 제동도 없이 말은 흘러갔다.
“네 어머니 성씨일 테니까. 부모님께 반씩만 물려받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하지만 어느 한 사람만 물려받는 사람도 세상에 없겠지. 그래서 그냥 네 성씨를 부를 때면 생각하는 거야.”
“…….”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대신에, 어머니로부터 이어진 것을 생각하는 기분을 특별하게 여기자고.”
아케치는 구두 코만 내려다보았다. 늘상 단정한 교복만큼이나 반질반질하게 닦아놓은 발끝이 새삼스럽게도 어색했다.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고 뒤를 돌아보았다.
보고 있으리라 예견했던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채도 없는 눈과 얽히는 대신 카논은 그를 등지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케치가 앉아 있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 그녀는 건반에 손을 올렸다. 이윽고, 힘 있게 건반을 누르면 완벽하게 조율된 오른쪽과 아직도 조율되지 못해 뭉툭한 왼쪽이 한 옥타브만 사이에 두고 같은 음계로 소리를 내었다. 건반과 건반이 곡이 되지 못한 채 음계를 차례로 짚어갈 적에 아케치는 비로소 조율된 것과 조율되지 못한 것을 알 것만 같았다. 몹시 어렴풋하게도, 그리고 평생을 다한대도 카논이 적확하게 짚어낸 ‘6분의 1도’라느니 금속이 얼마만큼 냉각되어야 본래의 음으로 돌아가는지 가늠할 시간 따위를 알 수는 없을 자신의 귀 또한. 그건 그저 다른 것이겠지. 카논에게는.
아케치는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너답지 않게 말하는 건 질색이야. 나를 실망시키는군. 그는 그 말이 소리가 없어서 송곳처럼 꽂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입 밖에 나왔으므로 남기만을 바랐다. 음계로 남지 못하고 소리로 터지지 못할 테니, 창문을 호되게 때리는 빗소리에 묻혀 듣지 못했음을 탓하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마침내 연습실을 빠져나가면, 언제 먹구름이 건물 전체를 덮고 있었냐는 듯 탁 트인 하늘과 함께 특정할 수 없는 빛으로 부서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끝에서부터 하늘이 부서지고 있었다. 비를 쏟는가 하면 채도를 인지한 눈에 비로소 담긴 하늘이 구름에서부터 쪼개지고 재편되면서 무수한 빛이 이지러졌다. 금분이 쏟아진대도 이상할 것 없는 하늘이었다.
아케치는 이 정경이 낯설지 않았다. 처음부터 퉁명스럽게 굴었지만, 그리고 인생의 그 어느 때라 해도 새삼스레 친절하게 굴 생각조차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종전처럼 굴지 않았다면 이 하늘을 볼 수 없었을 것만 같았다. 그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흉강을 채우는 공기가 장마철의 그것처럼 눅눅했고 찬란한 햇빛이 드리울 때처럼 서늘했다. 배태되어 태아로 불리던 생물이 비로소 첫 호흡을 할 적에 인간이 되면서 이런 공기를 마실 것이었다.
아, 갑갑하지 않다. 걸음 또한 물속을 걷는 것처럼 무겁지 않았다. 그는 비로소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태어난 이후, 잠을 자고 일어나 가장 그의 뜻대로 하고 싶은 것을, 가장 오랫동안 본모습을 보여왔던 사람에게 말한 것이다. 유치하고 허설스럽게도 아케치 고로는 누군가에게 설명하듯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돌아볼 곳은 없었다. 펼쳐진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아케치에게 펼쳐진 길은 그가 뜻한 것이었고 그가 소망한 것이었으니, 연습실이 남아 있을까 돌아보지 않았다. 재편되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세계 속에 다시 태어난 자가 들렀던 마지막 공간에 미련은 없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지만.”
아케치 고로는 천천히 걸어나간다.
잔해와 함께 그는 온전해질 것이다.